혈투 - 좋은 각본가가 바로 좋은 연출가인 것은 아니라는 사례 by Sion

혈투
박희순,진구,고창석 / 박훈정

21일 서울극장 시사회에서 보고 왔습니다.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라는 문제작과 흥행작의 시나리오로 2010년의 기린아로 떠오른 박훈정 작가의 감독 데뷔작이지요. 그래서 상당한 기대를 했었는데 그만큼 실망스런 결과였습니다.

광해군 11년에 만주벌판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3인의 조선군이 구사일생으로 국경 근처 한 객잔에 모이게 되며 벌어지는 인간군상극입니다. 극중 박희순과 진구는 서로 비밀을 간직한 친구사이, 고창석은 탈영병입니다. 그 비밀이 드러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처지에 처하게 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죠.

'혈투'는 겉으로 보이는 세 남자의 인생역정뿐 아니라 이야기 속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현재의 남북, 좌우 등 여러 정치상황을 낑겨넣을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찌질하고 산만하다는 느낌만 줍니다. 대표적으로 플래시백을 지나치게 남발하는 것을 비롯해 연출적 문제로 맥을 끊어버리고 긴장감 조성에도 실패해요.

세 캐릭터가 등장하면 보통 가위바위보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가 되어 누가 누구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죠. 그 관계에서 나오는 재미와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요즘 작품 중에 한 장소 고립 영화라면 한 명이 세 사람 몫을 하고도 남았던 로드리고 코르테스의 '베리드'를 추천합니다('127시간'은 아직 못 봐서;;).

또한 이야기로서도 매력이 없는데, 이런 형식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관객의 가치관을 시험하게 됩니다. 관객이 어떤 배경 스토리를 가진 캐릭터에게 이입하고 동정하느냐 혹은 지지하느냐가 영화를 판가름 짓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영화는 아무에게도 이입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지적 시점에서 '불쌍한 중생들아~'라고 깔아볼만한 쾌감이 준비된 것도 아니고요.

어제 시사회가 끝나고 나오는데 어떤 여자분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 딱인듯 싶네요. "아~! 진짜 하나같이 찌질한 새끼들!" 다시 연출의 문제로 돌아가는 거 같은데 그 배우들한테서 이렇게 밖에 못뽑아 내다니... 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마더'의 진구와 이 '혈투'의 진구는 마치 동명이인을 보는 거 같은 레벨차이를 보였습니다. 박희순과 고창석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밖에 이건 예상보다 더 저예산 영화인듯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공간 활용과 효과가 좀 빈티가 납니다;; 만주 벌판의 배경이라든가 내리는 눈이라든가 몇몇 부분은 좀 안타깝더군요ㅠ.ㅠ 조선에서의 회상씬은 그래도 볼만했습니다만 그래서 더 비교가 됐습니다_no

결론적으로 영화 '혈투'는 좋은 각본가가 바로 좋은 연출가인 것은 아니라는 실증 사례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처럼 각본만 쓰고 다른 감독이 맡았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아쉽습니다. 아마 한 번 정도는 더 볼 거 같은데 다시 보고 나서는 좀 더 재밌는 영화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_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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