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사나이 - 영화마저 파괴되면 곤란하다 by Sion

파괴된 사나이
김명민,엄기준,박주미 / 우민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시사로 보고 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실거라 생각합니다만 저도 김명민 대본좌가 나오는 강한 영화라서 기대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TV에서 보는 김명민 뒤에는 항상 그냥 본좌도 아닌 대본좌라는 호칭을 붙일 만큼 그의 연기를 좋아하고 신뢰합니다. 제가 산 유일한 드라마 DVD 박스 세트가 '하얀 거탑 감독판'일 정도니까요. TV 드라마에선 '불멸의 이순신', '하얀 거탑', '베토벤 바이러스' 등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쟁쟁한 연기들이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 쪽과는 제대로 화학 작용을 일으킨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의 지나칠 정도의 노력에 보상이 될 만한 영화가 없었달까요;;

'소름'이나 '리턴' 등은 공포 영화인 관계로 못 봐서 뭐라 얘길할 수 없지만, '무방비 도시'는 뭔 TV드라마 총집편스러웠고, '내 사랑 내 곁에'는 차력(?)에 가까운 감량 연기를 보였지만 그 이슈 이외에 아무 것도 남을 게 없는 영화였죠. 그래서 이번 '파괴된 사나이'를 더욱 기대해 왔습니다. 예고편에 목청 높여 부르짖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할 지어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지어다!!!"와 그에 이은 "...좆까고 있네."는 그런 기대를 부채질 했고요.
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그놈 목소리'처럼 유괴범의 목소리로 시작한 영화를 보고 나자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실망스런 결과였습니다.

마치 교회 설교 같은 영화였어요. 믿는 자들끼린 감동에 겨워 두팔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저 같은 비신자가 보기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그 정서에 공감할 수 없는 그런 광경이란 점에서요. 영화안에선 지들끼리 심각한데, 저한테는 저게 뭐하는 바보짓인지 란 생각만 들게 했거든요;;

* 이 밑으론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우선 이게 정말 시나리오가 좋은 가요? 이 영화 관련 기사에도 빠짐없이 언급되어 있고 심지어는 팜플렛 뒷면에도 자랑스럽게 실려 있던데 말이죠.

다시 한 번 새벗 님의 포스트에서 서스펜스와 놀래킴에 대해 살펴 보죠.
트뤼포 : '서스펜스'와 '놀라움' 간의 차이에 대한 당신의 정의를 듣고 싶습니다.

히치콕 : '서스펜스'와 '놀라움' 간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는데, 많은 영화에서 아직도 이 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하죠.
 지금 우리는 악의 없는 사소한 잡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 밑에 폭탄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쾅!'하고 폭탄이 터집니다. 관객들은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이 경우 놀라기 이전까지도 관객들에게 특별한 중요성이 없는 일상적인 장면만 보여 주었습니다. 자, 이제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상황을 살펴봅시다. 폭탄이 식탁 밑에 있는데 관객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그 곳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그 폭탄이 1시 정각에 터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마침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습니다. 관객들은 시계가 1시 15분 전을 가리키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똑같은 무해 무익한 대화에도 끌리게 마련입니다. 관객들이 그 장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화면 속의 인물들에게 "그런 사소한 얘기나 할 때가 아니야. 식탁 밑에 있는 폭탄이 곧 터질 거란 말이야!"라고 경고하고 싶어 안달하게 됩니다.
 앞의 경우 관객들은 폭발 순간에 15초간의 '놀라움'을 맛보게 됩니다. 나중 경우엔 15분간의 '서스펜스'를 맛볼 수 있습니다. 결론은 가능하면 관객들에게 정보를 알려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 의거하자면 이 영화는 일단 외양은 서스펜스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한 유괴사건이 종결되고 유괴범이 관객에겐 밝혀진 채로 시작하니까요. 그런데 서스펜스적인 요소는 거기서 끝, 나머지는 그냥 놀래키기로 채워버립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굉음으로 관객을 놀래킨다든지, 화면밖에서 갑자기 누가 덮쳐온다든지요. 의미 없이 휘발성만 강한 자극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가 그저 놀래키기만 하는 영화라 더 안 좋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게다가 등장하는 범행 수법들이나 대처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합성이 떨어져 보인 달까요;; 예를 들어 PC방에서 K660으로 유괴범을 꾀어내는 장면. 전부 다 빨간 모자를 쓰고 나오라고 답장하는 건 전직 목사이자 전전직 의사인 초 엘리트의 머리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멍청한 표식 아닌가 싶었습니다;; 범인이 누군지 짐작도 못하는 상태에서라면 일단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김명민이 분명 K660이란 단어에 반응하고 그에게만 다른 메일을 보내는 장면이 영화에 등장합니다. 그렇게 사람을 특정해서 일에 착수할 거였다면 아얘 유괴범이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전혀 다른 표식을 말했어야지요. 만약 빨간 모자가 깔린 것에 이상함을 느끼고 아지트로 돌아갈 것을 일부러 유도하기 위해 그랬다면 그것도 또 이상합니다. 미행은 어떻게 할 건데?;; 미행하는 걸 들켜서 유괴범이 아지트로 안 돌아가면? 영화에서도 결국 인적 없는 시골길에 유괴범 차를 졸졸 따라가는 형국이 되어 버리죠. 이걸 미행이라고 하는 건지;; 그 상황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겠다_no 영화에선 '그렇게 멍청할 거면 차라리 경찰을 불러!;;' 싶은 장면이 이 외에도 꽤 등장합니다. 오광록이 등장하는 GPS 추적기 씬에 이르면 관객석 곳곳에서 헛웃음이 터지더라고요(먼 산) 유괴 영화, 범죄 영화로서의 그럴듯함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예, 물론 그런 서스펜스나 스릴러 같은 겉모습은 다른 메세지를 위한 껍데기일 수도 있을 겁니다. 주인공이 전직 목사란 설정인데다, 감독도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로 제1회 서울기독교영화제 갓피상을 수상한 사람이니 종교나 철학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했을 지도 모르죠. 감독 스스로는 이제 기독교인도 아니고 종교적 메세지를 위한 영화도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 중에 배어 있는 것들이 스며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요. 서스펜스 스릴러로서 신통찮은 마당에 일단 그런 면이라도 찾아보려고 해봤습니다;;

근데 역시 기독교의 구원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성찰이 보이는 것도 아닌 거 같습니다. 중간에 형사가 스쳐가듯 얘기하는 "에이~ 이런 놈들 때문에 크리스천이 싸잡아서 욕 먹는 거지." 같은 푸념을 제외하면요;;
- 대체 이 목걸인 왜 등장한거냐;; -

아, 한 장면 있네요. 마지막 면회온 딸의 질문. "아...빠. 나 한번도 잊은 적 없어요? 나 계속 찾았어요?".

이 질문에 김명민은 웃는 듯 우는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눈물을 흘립니다. 명불허전 김명민 대본좌란 생각이 들게 한 영화 속 유일한 장면이네요. 8년 동안 딸을 계속 찾은 건 엄마였죠. 그는 애저녁에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장면에서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것처럼 그 거짓말이 깊게 다가왔습니다.

그 이외에는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끝납니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기만 한 장면도 몇몇 섞여 있고요. 이게 종교적 메세지를 차단하고 유괴 영화에 주력했다는 결과물이라면 참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도 좋은 소릴 듣긴 힘들 거 같군요.

여러 면에서 '추격자'와 '용서는 없다'가 떠오르는 상황. 당연히 칭찬이 아닙니다. 특히 '용서는 없다' 같은 경우 저건 영화가 아니라 혼성모방 퍼포먼스를 하고 싶었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요소가 전혀 없는 걸 넘어 기존 작품들의 요소를 짜깁기한 복제품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그 영화에서의 설경구와 이 영화에서의 김명민이 겹쳐보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추격자' 이후 진부한 캐릭터지만 사이코 패스 유괴범을 소화한 엄기준 쪽이 좀 더 그럴 듯했습니다. 초고가의 오디오를 사기 위해, 천상의 소리를 듣기 위해 유괴와 살인으로 돈을 버는 사이코 패스란 건 좀 독특했어요. 그렇게 구축해 놓은 오디오룸에서 나체로 성가를 듣는 씬은 말 그대로 신 앞에 발가벗은 죄인의 형상이었겠죠.

이 부분에서도 아쉬운데 유괴범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과 딸을 빼앗긴 전직 목사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크로스 됩니다. 살인자와 배교자, 의미는 다르지만 타락한 두 남자. 적어도 기독교적으로라도 더 파고 들어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들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장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없는 나열로 그냥 넘어가더라고요.

더불어 8년 동안 유괴범에게 길러진 딸 역도 인상 깊은 연기였고요. 하지만 딸 역할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조금 아쉽습니다. 서스펜스 스릴러적 요소도, 종교적 함의에 대해서도 미적지근하길래 8년간 유괴범에게 길러진 딸이란, 영화적으로 독특한 소재이자 캐릭터를 활용해 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최소한 '용서는 없다'보단 낫네요. 소재는 신선한 면이 있으니.

그래서 유괴범에 의해 길들여진 8년의 세월 동안 딸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에 대해 나올까 싶었는데 유괴범 죽고 나니 거의 아무 영향 없이 잘 먹고 잘 크는 군요_no 중간에 발목에 족쇄도 아닌 빨간 실로만 구속 당한 장면을 보았을 때는 뭔가 색다른 상황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빨간 실이란 걸로 상징될 수 있는 어떤 의미라던가, 하다못해 '쇼생크 탈출'에서 감옥 생활에 길들여진 나머지 자기 스스로는 소변 보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래드처럼, 실 한가닥이지만 유괴범에게 길들여져 구속이 풀리더라도 집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든가 뭐 그런 상황들이요. 근데 아빠가 '도망쳐!'라니까 손톱만 씹던 애가 잘만 도망치더군요;;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영화로서는 재앙인 듯;;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쁜 영화는 나올 수 있어도 나쁜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는 없다.'란 말이 있다더군요. 실제 촬영에 들어간 단계에서 시나리오가 얼마나 좋았는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정말 좋은 시나리오였다면,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쁜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쯤 되면 김명민의 대본좌 파워는 TV드라마 같은 긴 호흡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건가 싶은 의심마저 들기 시작합니다. 저는 "믿쑴미다!"로만 일관하진 못하는 불신자이다 보니;;

유괴 영화로서도, 종교 영화로서도, 김명민의 영화로서도 아쉬움이 넘치는 영화였습니다.

7월 1일 개봉 예정.

바쁜 현대인을 위한 한줄 요약 : '오디오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는 진리의 명언 + 사이코패스 유괴범도 한순간에 을로 전락시키는 사장님은 슈퍼 갑

P.S :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 보고 제1회 휴고상 수상작이었던 SF 소설 '파괴된 사나이(The Demolished Man)'의 영화화인가?! 란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전혀 아니었지만 소설에서도 후크송(?)이 주요한 소재로 쓰였던 걸 생각하면 오디오 매니아가 범인인 이 영화와 아주 상관이 없는 건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나왔네요^^; 하지만 소설보다는 다른 이유로 이 제목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찬욱의 복수3부작의 첫번째 '복수는 나의 것'이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가제가 '파괴된 사나이'였다고 하네요. 박찬욱 감독이 SF 팬이라고 하니 결국 돌고 돈 제목이 되는 거겠습니다;;

P.S2 : 장면 간에 화면이 불균질한 거 같습니다. 마치 돈없이 찍은 독립영화처럼 열악한 장면이 몇 번 나와요. 예를 들어 유괴사건 8년 후 김명민과 박주미가 그녀의 미아 사무소 앞에서 얘기를 나누는 씬은 상당히 저렴해 보이더군요;; 그런데 다른 장면은 또 안 그러고;; 그랬다 안 그랬다 하니 되게 튀더군요;; 마지막 크레딧에 보니 레드원으로 찍은 거 같은데 왜 그럴까요;; 그냥 착각인가_no

P.S3 : '악마를 보았다'를 비롯해 앞으로 예정된 강한 영화들이 덩달아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추격자' 이후 한국 영화계의 상황은 '에반게리온' 직후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보는 거 같아요;; 무분별한 모방과 창조력의 부재. 아무리 팔려서 그런다지만 아류작 생산도 정도껏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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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산왕 2010/06/29 15:42 # 답글

    PS3에 동감입니다. 어찌 되어갈런지; 재생까지 10년 걸린다거나 orz
  • 지나가다 2010/06/29 15:47 # 삭제

    추격자:서
  • Sion 2010/07/01 03:55 #

    과연 '파'가 나올 때까지 입니까?! ㄱ- 개그에 억지 감동 섞기도 그렇지만 이제는 정형화의 정도를 넘어 틀에 박혀 나올 생각을 잘 안하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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