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The Book of Eli) by Sion

일라이
덴젤 워싱턴,게리 올드만,밀라 쿠니스 / 알버트 휴즈,알렌 휴즈

2주 전에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시사회로 보고 왔습니다.

이 영화는 '세기말 사도 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믿는 신의 말씀을 지키고 전하려 떠도는 방랑자의 이야기니까요.

이미 1999년도 지난 21세기지만 저런 멸망스런 묵시록의 분위기는 역시 '세기말'란 단어가 제일 잘 어울리는 거 같군요. 물론 세기말의 구세주는 켄시로입니다만(응?!;;).

초반부터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일라이의 책'이 개신교의 킹 제임스 성경이란 게 밝혀지면서 이야기가 좀 뻔한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네타(스포일러)랄 수도 없는게, 어차피 영화 제목이며 주인공의 이름인 일라이(=엘리) 자체가 엘, 엘로이, 엘로힘 등과 함께 대표적으로 신(혹은 신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이죠. 제목부터 '신의 책'이라 그런지 반 농담으로 '츄리닝'의 '스포일러' 에피소드가 생각났네요;;(지금 생각해 보니 완전 저런 제목 아녀?!_no)
영화의 액션 자체만 생각하자면 저는 슬로우 모션의 남발이 좀 지루했습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슬로우 모션 칼부림이 꽤 남용되는 거 같던데 요즘 유행하는 액션 방식일까요?;;

하지만 멸망 후 You와숔! 적자 생존의 세계를 서부 개척시대처럼 재구성하며, 무기를 사용한 액션은 사무라이 칼부림 영화가 떠오른 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주인공이 계속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런 세계관에 부합해 황금을 찾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리던 골드 러시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책이란 소재의 세계관으로서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찾아가는 동방박사를 생각나게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액션의 세계관은 마카로니 웨스턴의 연장선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츠바키 산쥬로(椿三十郞)' 등에서 느껴지지만 구로사와 아키라는 존 포드의 서부 영화를 홈모해 사무라이 영화로 오마쥬를 바쳤고, 세르지오 레오네는 그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빠져 '황야의 무법자(Per un pugno di dollari = A Fistful of Dollars)'라는 서부 영화로 번안한 적이 있으니 이 '총-칼-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한 액션 방식을 다시 칼로 환원(혹은 혼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그 격이 높은지는 솔직히 좀 모르겠지만;;). 영화의 끝에 밝혀지는 것처럼 맹인인 일라이의 칼부림은 맹인 검객 자토이치에 다름 아니기도 합니다. 사실 극중 직접적으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2탄 - 석양의 건맨(Per qualche dollaro in più = For A Few Dollars More)' 주제음(엔니오 모리꼬네의 그 유명한;;)이 흥얼흥얼 흘러 나오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정도죠;;

성경을 소재로 한 부분의 세계관은 극의 후반, 소녀를 인질로 잡혀 책 그 자체만을 탐하는 권력자(게리 올드만)에게 성경을 빼앗긴 후부터 조금 반전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빼앗겼지만 일라이는 책을 잃은 것보다 여태 그 말씀을 되뇌이기만 했지 아직 그 말씀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하는데, 이 장면에서 영화는 좋은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껍데기에만 집착하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며, 사람들에게 이로운 형태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걸 그 자체로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눈먼 자가 총칼이 횡행하는 적자생존의 세기말에 사도로 나서고, 여자는 이미 TV조차 잊혀진 세상에서 베스트 드라이버처럼 운전하는 모순을 보이는 등 영화는 감정 논리엔 충실한 편이지만 영화적 논리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제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종교가 딱 그런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일라이만 해도 멸망과 함께 맹인이 되었고 그 이전에 특수훈련을 거친 사람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멸망 전 직업은 단순히 월마트 직원이죠. 이런 설정만으로는 그런 액션과 여정을 그리는데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에서 맹인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건 대표적인 기적이 아니던가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신의 역사하심, 즉 기적입니다. 영화는 바로 그 논리에 부실하며, 동시에 충실합니다.

마지막으로 죽어가는 일라이가 기어코 그 말씀들을 가져가는 장소가 멸망 이전 옛시대 죄인들의 온상이며, 멸망한 다음은 가장 안전한 곳이 된 알카트라즈 형무소라는 것도 재밌는 부분입니다.

그 여정 끝에 일라이가 가져온 말씀은 새로운 개신교 성경으로 편찬되어 이미 편찬을 끝낸 유대경 토라와 코란 사이에 꽂힙니다. 이 부분도 나쁘지 않네요.

생각해보면 그곳에 꽂힌 책 한 권들마다 이 영화 같은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 장면에서 그 개신교 성경만 따로 숭엄하게 봉헌되는 장면 같은 게 나왔겠죠. 하지만 영화는 다른 종교의 경전들은 물론 다른 분야의 책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위치에 '일라이의 책'을 꽂습니다. 알카트라즈 도서관이 소장한 무수한 책들 중 하나란 거죠. 그 책들 사이에 우열은 없으며 똑같이 존중받고 똑같이 소중할 뿐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종교의 평등과 관용을 보이는 영화였어요.

그러나 알카트라즈에 도착한 후의 그 엔딩 시퀀스가 나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좀 사족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해 말씀을 전하라는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 일라이를 따르던 소녀가 후계자로서 나서며 다시 알카트라즈를 떠나는 건 노골적으로 2를 암시해 더더욱 사족같았네요;; 새로 간행된 개신교 성경이 책장에 꽂히는 걸로 끝나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모 단편처럼 '빛이 있으라'로 끝나는 것도 깔끔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솔직히 전 일라이가 창세기의 그 부분을 읊으며 클로즈 업 될 때 영화가 끝날 줄 알았어요(쿨럭;;).
음, 굉장히 종교적인 소재를 택했으면서도 생각보다 종교에 대해 열린 사고의 이 영화를 보면서, 반대로 어쩌면 기독교는 위기 의식을 느끼는 중인가? 싶었습니다.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도 그렇고, 얼마 전에 본 '블라인드 사이드'도 그렇습니다. 전자는 '경전 말씀이 인생에 도움 되기는 유행가 가사 정도다(혹은 인생에 도움되기로 따지면 유행가 가사도 경전만큼 위대하다?;;)'로 보였고, 후자는 그 나라 그 종교의 가치를 가장 선하게 표출하였을 때 오는 가장 좋은 결과를 조명했으니까요.

이 영화까지 포함, 공통적으로 '경전 그 자체로서의 해석이 아닌,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 실천이 중요하다.'란 메세지를 계속 보이는데, 이게 좋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보이기도 하지만, 워낙 저지른 게 있어서들 상황 타개용 물타기로 보이기도 한다는 게 좀 안타깝네요;;

바쁜 현대인을 위한 한줄요약 : 멸망_후_TV조차_모르는_세상에서도_복음을_전하는_아이팟의_위엄.avi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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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파인애플달링 2010/04/26 08:16 # 답글

    바쁜 현대인을 위한 한줄 요약이 최고인듯..-_-b
  • Sion 2010/04/28 00:41 #

    내가 원래 배려쟁이잖...ㄱ-)b
  • Niche 2010/04/26 19:38 # 답글

    역시 애플......-┏d
  • Sion 2010/04/28 00:41 #

    하지만 애플은 까야 제맛ㄱ-)b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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