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트 로커(The Hurt Locker) by Sion

허트 로커
제레미 레너,안소니 마키,브라이언 개러티 / 캐서린 비글로우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일반 상영으로 보고 왔습니다.

"전투의 격렬함은 마약과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 (The Rush of Battle is Often a Potent and Lethal Addiction, for War is a Drug)" - 크리스 헷지스 (Chris Hedges)

위와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 허트 로커는 바로 다음 화면에서 'War is a Drug(전쟁은 마약이다.)'란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전쟁은 마약이며 중독자는 더욱 강한 마약을 요구합니다. 모든 자극은 곧 무뎌지기 마련이며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니까요.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은 뭐니뭐니해도 직접 폭탄 제거 현장을 체험하는 듯한 긴장감 조성일 겁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첫 폭탄 해체 작업은 그 폭발 씬을 초당 1000프레임의 HSC(High Speed Camera)로 촬영해 폭발부터 사람이 파편과 충격파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까지의 찰나를 한 장면 한 장면 빠짐 없이 그려냅니다. 폭발, 땅울림, 튀어오르는 먼지, 화염, 파편 등등 모든 것을요.
저는 이 부분에서 미하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Funny Games U.S.)' 인트로를 처음 봤을 때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영화 모두 첫 굉음이 그 후의 진행에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 솔직하게는 쫄게;; - 만들었거든요;;

또 하나 영화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폭발물 해체 작업 시 미군이 이라크 인들과 육안, 카메라, 스코프 등으로 교환하는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들은 저에게 '열자(列子)'의 '의심암귀(疑心暗鬼)'란 고사를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 고사는 '나무꾼이 도끼를 잃어버리자 이웃집 아이가 의심스러웠다. 그런 마음으로 그 아이를 보니 걸음걸이도, 안색도, 말투도 어느 행동거지 하나 뺄 것 없이 자기 도끼를 훔쳐간 도둑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우연히 다른 곳에서 도끼를 찾았다. 자기가 다른 곳에 두고 깜빡한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아이를 만났는데 행동거지는 여느 때와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란 이야기입니다.

결국 자기가 처한 상황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의심어린 시선이 귀신을 만들어 낸 셈인데, 미군들의 시선이 바로 이런 시선이 아니었나 싶어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니 구경꾼도 모조리 테러범 같아 보입니다. 아마 뉴욕 월마트 한복판에서 만났다면 아무 생각 없이 스쳐지났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요. 하지만 실제 일어나는 폭발들은 그 의심을 강화시킵니다. 이라크 인이라면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하나 뿐인 목숨이 걸렸으니.

핸드헬드를 비롯해 현장감 넘치는 이 영화의 카메라들은 이런 눈에 비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관객들에게도 오롯이 체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그랬지만 항상 함께 회자되는 '아바타'처럼 오버 테크놀러지에 가까운 기술 투자가 아닌, 평범한 영화 기술과 촬영, 편집만으로 만든 영화적 개가라고 생각합니다.

이 전장 체험은 군대를 갔다온 저에게 자연스레 군대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허허로운 사막 벌판을 원경으로 잡으며 폭발물을 터뜨려 처리하는 장면에서는 제가 군 시절 논산 훈련소에서 경험했던 크레모어 격발 시범을 상기시켰습니다. 격발 스위치를 누르자 불꽃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고 땅 전체가 흔들리는 듯 진동이 몰려오며 폭발음이 들렸죠. 특히 저는 당시 지진이 일어난 듯한 땅울림에 경악했습니다(전 얼마 전에 안양(?) 쪽에서 일어났던 지진도 못 느꼈을 정도로 둔하다면 둔한 편입니다;;). 크레모어 하나가 터졌을 때 이 정도인데 진짜 폭탄이 빗발치는 전쟁이 나면 사람이 걸어다닐 수나 있는 건가? 란 의문이 제일 먼저 들었더랬습니다;;
영화 속 이 장면에서도 폭발의 화염과 폭발음 사이에 약간의 인터벌이 있는데 이런 디테일한 면들이 영화를 더욱 리얼하게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사운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례로 의자 밑바닥이 떨리며 우퍼가 터질 정도로 쿠르릉 울려 퍼지는 폭탄의 폭발음 덕분에 군대에서의 크레모어 경험이 떠올랐을 정도니까요.

사실 단순히 군대나 군장비가 영화에 나온다고 군대 생각이 떠오르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트랜스포머'에서 미군이 제 아무리 물량을 쏟아 붇는다고 해도 그건 단지 엔터테인먼트였을 뿐 군대 생각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 '허트 로커'는 많은 경우 폭발 효과에 CG도 쓰지 않았다던데 이런 체험을 시키다니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더더군다나 이런 느낌을 여성 감독이 만들어 냈다는 데서 말이죠.

예산 때문인지 주연에 아주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진 않습니다. 어찌보면 주인공도 스테레오 타입인 부대 안의 '사신' 캐릭터죠('AREA88' 등에서 많이 봤던;;). 하지만 전쟁에 중독되어 버린 그가 전쟁터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은 여전히 힘을 갖습니다.

특히 그 마지막을 포함해 중간 중간 뜨는 문구들이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브라보 부대 본국 귀환까지 38일'로 시작해 '델타 부대 본국 귀환까지 365일'로 끝나는 영화의 카운트다운 문구는 시한 폭탄처럼 정말 많은 심상을 전해주었습니다. 브라보 부대 이전에도 365일은 있었을 것이고, 델타 부대 이후에도 365일은 있을 겁니다. 정말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 될 것만 같더군요;; 단순한 정보 제공 이외에 이런 영화적 심상을 만들어 내는 타이포그래피로서의 의미가 숨막히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속 문구가 이런 심상을 전해주는 건 '훌라걸스(フラガ-ル)'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결국 이 영화에서도 사신은 전쟁에 중독된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더 강렬한 맛을 보기 위해 전장으로 돌아옵니다. 전쟁은 그렇게 끝없이 계속되겠죠.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금단 증상을 각오하고 그곳을 빠져 나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P.S : 바로 전사하지만 현상금 사냥꾼(?) 랄프 파인즈의 깜짝 등장은 의외;; 많이 본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했습니다;; '타이탄' 본 지도 얼마 안 됐는데_no

P.S2 : Hurt Locker의 뜻을 찾아보니 구구절절 길던데 한마디로 '막장'이 제일 어울리지 않나 생각해 봄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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