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한국 애니메이션 전설의 부활 by Sion

- 당시 실렸다는 '홍길동' 신문광고 -

25일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 폐막작인 '홍길동'을 보고 왔습니다. 신동헌 감독이 친동생인 신동우 화백(94년 타계)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1967년에 내놓은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필름이 유실되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환상의 작품으로만 회자되었지요.
영상이 없으니 그 신화창조적인 무용담이 오히려 더 도드라졌었습니다. 셀룰로이드 필름이 없어 미군부대를 전전하며 모은 유통기한 지난 필름을 양잿물에 불려 썼다던가, 애니메이션용 물감이 없어 시간지나면 다 들떠버리는 포스터컬러를 썼다던가, 카메라도 없어 기증 받았는데 그 촬영에 썼던 카메라가 나운규의 것이었다던가,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다들 죽을 고생을 하며 완성시켰다는 얘기 등등 말입니다. 결국 그런 신화창조적 고생은 개봉 4일만에 관객 10만을 넘으며 그 해 전체 영화 중 흥행 성적 2위라는 전설적 블럭버스터 애니메이션을 낳았다지요.

그렇게 구전되기만 하던 전설이 작년 11월 애니메이션영화 연구자 김준양 씨에 의해 소재가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오사카의 한 사설 아카이브에 16mm 필름으로나마 보관되어 있었다는군요(원본은 35mm 필름). 그 후 도쿄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보존 상태가 먼저 발견한 오사카 쪽 필름이 나아 그 필름을 기본으로 복원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발견한 필름은 완전한 한국판이 아닌 일어더빙된 일본판이었다고 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영상자료원에는 35mm 사운드 네거필름만 남아있던 터라 구해온 일본판 16mm를 35mm로 확대하고, 거기에 보존하고 있던 우리나라 사운드를 영상에 맞춰 넣었다고 하네요. 그래서인지 고전영화답게(?) 마지막이 아닌 맨처음 등장한 스텝롤에는 우리나라 스텝 몇몇이 한문으로 나오고, 이어 성우 등 일본판 스텝들이 나왔습니다. 스텝롤이 끝나자 본편 시작에 앞서 '홍길동'이 뭔지 잘 모를 일본 관객들을 위한 '한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전통 이야기...'라는 식의 짧은 일어 설명이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제목 역시 아쉽게도 한글 '홍길동'이 아닌 일본 제목 '少年 勇者 ギルドン(소년 용자 길동)'으로 나왔어요.

...순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길동이를 길동이라 보지 못하고 '기루동'으로 봐야한다는 현실이 억울했..._no
- 동료와 함께 앉아계신 신동헌 감독(모자) -

그 후에는 거슬리는 부분없이 덧씌운 한국어 더빙 속에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것 역시 완전판은 아니라는 겁니다. 신동헌 감독이 상영에 앞서 인사말로 한 얘기지만 몇몇 장면이 이번 판에서도 보이질 않는다네요. 아마 일어더빙을 하면서 편집되어 삭제됐던지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갈 때부터 원본이 훼손되어 있었겠지요;;

그래도 아얘 볼 수 없었던 때에 비하면 이정도도 감지덕지인 것 같습니다. 90% 정도의 얼개는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번 상영은 뭐니뭐니해도 20세기에서 21세기로 그야말로 세기를 뛰어넘은, 40주년만의 첫 재개봉이니 의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감독도 '40년 동안 실종되었던 자식을 다시 만난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어요.
- 40년 만의 부활을 위해 다시 모인 어제의 용사들. 왼쪽부터 유성웅 키 애니메이터, (하나 건너뛰어 모자쓰신 분이) 신동헌 감독, 용유수 제작진행, 조민철 촬영기사. 왼쪽에서 두번째 선 여성은 이번 '홍길동' 복원 프로젝트를 주관한 조선희 한국영상자료원장. ...근데 맨 오른쪽에 찍힌 분은 누구??_no -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 감상에 들어가자면 고전 애니메이션다운 음악의 적극적인 사용과 선곡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렸을 적 AFKN에서 보던 워너 브라더스 극장이나 그 유명한 '톰과 제리'처럼요. 물론 제작사였던 '세기상사'가 디즈니 고전 작품들의 국내흥행성적에 고무되어 '홍길동'을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니 '피터팬'이나 '밤비' 등의 디즈니 고전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겠죠.

개인적으로 이 고전 작품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유는 클래시컬한 BGM이 효과음을 시작으로, 극단적으로는 캐릭터의 액션 리듬까지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게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게 들리는 어떤 합일의 경험이랄까요? 게다가 이 '홍길동'은 클래식 뿐 아니라 국악의 사용에도 적극적입니다. 예를 들면 홍길동 일행에게 맞아서 날아가던 포졸이 빨랫줄에 떨어져 튕길 때는 가야금 산조로 '뚱~따당~' 익살스레 그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또. 백운도사가 길동에게 준 시련의 한 장면에서는 무려 '아리랑'이 퓨전 편곡에 가까운 느낌으로 흘러나오며, 그 리듬에 맞춰 해골들이 춤을 추기까지 하더군요. 이 양악과 국악을 넘나드는 음악적 만듬새는 오늘날에도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감탄했습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작품은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에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엔 디즈니 등 메이저 스튜디오나 할 수 있었던 방식이라,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선지 간혹 어색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입술과 음성의 싱크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습니다.
- 40년만의 첫 재개봉 티켓 앞면에 받은 신동헌 감독(우)과 용유수 제작진행(좌)의 사인 -

음악의 탄탄한 받침이 있어서인지 영상면에서도 상당히 출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40년의 풍상으로 주룩주룩 비가 오고 색감이 전체적으로 바래버린 건 아쉽지만요. 이부분은 추후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설마 그냥 그대로 방치할 생각은 아니겠죠?;;

출중한 영상의 예를 들자면 우선 길동이와 홍판서 본부인 하인의 첫 전투씬을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 하인은 한밤중에 본부인의 명을 받고 암살자로서 길동이의 방에 잠입한 상태입니다. 곧 깨어난 길동과 암살자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방에 놓인 호롱불빛을 받은 듯 각 캐릭터의 그림자가 벽과 천장에 비치는데, 이 그림자 효과가 상당히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캐릭터의 액션에 흔들리는 호롱불이 그들을 되비쳐 흩날리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이 그림자가 암살씬의 긴박감을 표현해 주었달까요?

물론 오늘날의 눈으로 보기에 전체적 움직임이 다소 빠르단 느낌은 분명히 듭니다. 그건 고전 영화 기술의 어쩔 수 없는 영역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찰리 채플린 영화나 그 이전 기록필름들에선 다소 이질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거처럼 말입니다. 적캐릭터와의 전투씬 자체가 좀 짧고 장면반복이 있는 편인건 아쉽지만 - 병조판서와의 마지막 전투씬은 근두운(?)까지 타고 날아오르는 액션은 좋았지만 라스트 보스치곤 절대적인 전투시간이 좀 짧지 않았나 싶은... - 각 캐릭터의 움직임과 작품 전체적인 액션 리듬은 좋은 편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영상이 꼼꼼하기까지 합니다. 이건 백운도사의 제자로 들어간 길동이가 눈보라 치는 날 도사와 검법 수련을 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데, 그냥 표현 안하고 치워도 될 법한 눈밭 위 발자욱을 캐릭터들의 이동경로에 맞춰 정확히 찍어내더군요. 여기서도 또 한 번 작은 감탄을 했습니다.

영상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본원적 의미에서 만화적 과장(몸짓, 표정)이 출중하다는 겁니다. 특히 엄가진을 비롯한 악역들의 노골적으로 속물적인 표정과 백성들의 학정에 찌든 비루한 얼굴 등 실제 배우로 치자면 표정연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몸짓 역시 한시도 가만 있질 못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동적인데 그 과장이 표정과 합쳐져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감독 인터뷰에도 "만화영화는 어디까지나 웃음과 개그가 기본이야"란 말이 나오는데, 그 말에 한치의 모자람도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만화적 과장을 악역과 주변인물들 뿐 아니라 길동이와 차돌바위도 적절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밖에도 21세기인 현재 현역으로 뛸 수 있을만한 상업 애니메이션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주인공 곱단이 보다 더 예쁘게 그린 거 아닌가 싶은 꽃미남 주인공 홍길동과 감초스런 조역을 톡톡히 해내는 차돌바위야 말할 것도 없지만, 초반에 길동이가 구해준 새끼호랑이는 강아지 같아 보일 정도로 귀여운 동물캐릭터였습니다. 당연하지만(?) 나중에 커서 은혜갚으러 오죠. 홍판서댁 하인 콤비도 개그에 한 몫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반농담입니다만 아무리 봐도 백운도사는 생긴 거 답잖게(?) 츤데레 캐릭터?!ㄱ-(콰쾅!)

아니, 그게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는게, 제 눈이 좀 썩은 탓(?)도 있지만, 길동과 차돌바위가 백운검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왔을 때는 별의별 시련을 다 준 후에 한다는 대사가

"벼,별로 너희들을 제자로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아냐. (단지 우리 집이 원래 절벽 위에 세워져 있어서 그런 것 뿐이라구, 흥!)" ( <- 조금 다르지만 결국은 이런 대사;; )

라던가, 차돌바위는 일찌감치 도망치고 길동이만 남아 검법을 사사한 후 하산하자, 그 하산길에 다시 한 번 몰래 나타나 길동이를 뒤에서 덮치고(?!) 한다는 소리가

"(벼,별로 니가 떠나는 게 아쉬워서 그런 건 아냐.) 단지 살기 없이 뒤치기를 시도하는 적에 방심하지 말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 뿐이라구, 흥!(볼을 붉히며연기처럼 사라짐)" ( <- 이쪽도 제 썩은 눈으로 봐서 조금 다르지만 결국 이런 대사;;)

였거든요. ...죄송합니다_no 하지만 영화 내내 츤츤 거리는 백운도사가 넘흐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삐져나왔어요_no
- 티켓 뒷면에 받은 조민철 촬영기사, 유성웅 키 애니메이터, 발굴자 김준양의 사인 -

내용도 복원되지 못한 빠진 씬이 있어선지 다소 점프 된단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액션과 마찬가지로 흘러가는 리듬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홍길동전'이라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초 유명 원작을 바탕으로해서인지 끊긴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도 크게 거슬리는 편은 아닙니다.

게다가 가렴주구하던 탐관오리 엄가진이 길동의 공격에 도망치다 커다란 보자기에 넘어져 제풀에 싸이자 "이건 보자기에 싸인 쥐박이 쥐새끼 꼴 아니냐~! 핫하하~"라고 호탕하게 비웃어 주는 길동의 모습은 정말 통쾌했습니다. 길동에게서 풀려난 후에도 제버릇 개 못준다고 홍길동을 잡아오는 자에게 천냥을 주겠다고 선언하는 엄가진. 그리고 그 말에 혹한 부하들이 득달 같이 달려나가자 "내가 이러니 돈을 좋아할 수 밖에 없지~"라며 비열하게 돈맛을 다시는 장면은 현 쥐박이 mb 세상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라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보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후련함을 주는 '홍길동'이란 이야기의 힘을 새삼 느꼈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의 힘을 이토록 잘 전달해 주는 이 작품의 위력도 포함해서 말이죠.

병조판서가 홍판서댁을 공을 차지하기 위해 잡아 넣는 전횡을 일삼는 건 물론이고, 중앙정부가 앞장서서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연행해 족치는 장면의 직접적 묘사는 "원작이 그래요~ 허균이라도 무덤에서 깨워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하시던가"라는 듯 하여 각본을 쓴 감독 형제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67년에 그런 깡이라니;; 하지만 그 모습이 40년이 지나 21세기인 오늘 - 특히 요즘 - 도 여전히 오버랩 되며 유효하단 것은 쵸큼 슬픈 일인듯_no

이 작품은 맨처음 말씀드린대로 당시 블럭버스터로서의 소임도 다했지만, 단순히 흥행성적뿐 아니라 작품 자체의 의미와 위력이 아직까지 퇴색하지 않고 있다는 게 정말 감명깊었습니다. 흥행성적도 성적이지만, 이 완성도 쪽이 오히려 '전설'이란 칭호를 받기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류 신화는 "원래 온 대륙이 다 우리꺼였다능~ 짱깨들, 쪽바리들 다 꿇으라능~ 항가항가~" 이딴 식으로 남을 멸시하며 자위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지만, 제대로 된 전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자긍심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꺼지지 않은 용기와 자긍심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전설을 미래에 역사로 만들겠죠. '홍길동'은 그 역사를 위한 전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 부활한 이 전설을 현실 속 역사로 만들어줄 후학들이 나오길 빌어봅니다. 더이상 신화창조는 좀 그만하고요.

P.S : 맨처음 홍판서 댁 잔치에 대문 앞에서 술마시고 싶다고 타령하던 하인 콤비를 보니 이런 망상이 들었습니다. '홍길동'에 앞서 애니메이션으로 된 진로소주 CF를 만들어 히트친 신동헌 감독이니까, 요즘 같았으면 저 잔치 장면에서 진로소주 PPL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요^^; 하인들이 그 CF에 등장했던 선원들과 똑같이 생겼다면 더 웃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일종의 까메오?!
- 상영관 로비에 옛 영화 포스터 들이 잔뜩 걸려 있길래 찍어 본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내츄럴'. 어렸을 때 '인디아나 존스3 : 최후의 성전'과 함께 녹화해 놓고 가장 많이 반복 시청했던 영화라 반가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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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계란소년 2008/05/28 02:02 # 답글

    제 이름이 많이 나오는군요.[...]
  • Layner 2008/05/28 02:06 # 답글

    허억, 이걸 놓쳤군요. 조만간 다시 볼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ㅠ.ㅠ
  • 세바스찬 2008/05/28 09:16 # 답글

    보셨군요. 일요일 저녁 때라서 귀차니즘에 안 갔는데.. 다시 볼 기회 있었으면 하네요.
  • 2008/05/29 17: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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